“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
빨간 넥타이에 뉴스타 정장차림의 고 남문기 회장이 생전에 투박하게 미소짓던 모습(사진 위). 가운데 사진은 남 회장이 2019년 7월 미주한인회총연합회(이하 미주총연) 28대 총회장에 취임하면서 연설하는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간암투병 때문에 마지막이 된 2018년 연말 뉴스타 어워드 때의 단체사진.
뉴스타부동산그룹 고(故) 남문기 회장
사망 1주기 앞두고 돌아보는
‘빨간 넥타이 신사’의 삶과 추억
빨갛고, 하얗고, 파란. 뉴스타부동산그룹 고(故) 남문기 회장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스친 인상이다. 하얀 바탕에 매어진 빨간 넥타이, 그리고 뉴스타 로고가 새겨진 파란 정장 차림. “일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고객 맞을 단정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고집했던 남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런 탓일까? 남 회장이 떠난 지금도 뉴스타 식구들은 ‘뉴스타 패션’을 고집한다.
남 회장은 간암 투병을 하며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와중에도 정장을 고수했다. 지난 2019년 여름이다. 간암 치료차 서울의 건국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이던 남 회장은 오후에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마침, 병실을 찾은 지인을 앞에 두고 남 회장은 빨간색 넥타이를 고쳐맸다. “회장님, 곧 수술하실텐데, 왜 정장을…?” 남 회장은 “수술이야 잘 될 걸로 믿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혹시라도 갈 때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 싶은 거지. 그래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아서.”
고 남 회장은 그랬다. 힘겨운 투병생활로 삶을 초탈한 듯 했지만 해야 할 일에 준비가 철저했다. 삶에 그만큼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지난해 3월 20일 68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빨간 넥타이 신사’ 남 회장은 미주 한인들에게 아직도 그렇게 남아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어딘가에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
#. 인생은 직진이고 도전
2019년 7월 조선일보 LA는 창간호를 내면서 성공한 경제인으로 고 남 회장을 인터뷰했다. 그 해 5월 남 회장은 사위(서지오 성)로부터 간을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아직 회복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였다. 남 회장의 건강을 의식해 인터뷰하는 기자가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남 회장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호탕하게 우려를 날려버렸다. “난, 어쨌든 활동하고 싸워야 해.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내 건강은 싸워야 좋아진다니까. 어떤 일이든 치열하게 하는 게 내가 사는 법이야.”
당시, 미주한인회총연합회(이하 미주총연) 28대 총회장에 취임한 남 회장은 “미주는 물론 해외한인들을 위해 복수국적 회복연령 확대, 참정권 행사를 위한 우편투표 허용, 동포청 설치 등을 얻어내기 위해 한국정부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겠다”는 말도 했다.
마침, 미주총연 총회장 취임식날 현장을 찾아 축사를 한 김인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남 회장을 두고 이런 덕담을 했다. “남 회장은 ‘싸움꾼’이다. 해병대 기질이 충만하다. 그런 정신으로 모국과 미주 한인들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길 바란다”고.
남 회장은 한국 해병 266기 출신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못 하면 할 때까지’라는 해병정신으로 무장했기에 “정면승부”라는 말을 하기를 즐겼다. “인생은 직진이라 어떤 일이든 정공법으로 가야한다”는 게 남 회장의 지론이었다.
1982년 1월, 수중에 달랑 300달러만 들고 미국에 이민와 청소, 페인팅, 정원관리 등의 힘든 일을 하면서도 한인 부동산업계 최대규모의 뉴스타부동산그룹을 일군 것도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쳤던 남 회장의 기개 때문이지 않았을까!
#.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재미있게”
투박한 미소,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에는 구수함이 뭍어났다.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하지만, 고 남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선이 굵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기억력이 비상해 범상치 않았다”고.
미국으로 이민 온, 남 회장의 첫 직업은 청소회사의 매니저였다. 말이 좋아 매니저지 사장과 남 회장 그리고 히스패닉 직원 2명이 전부인 영세한 청소용역업체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남 회장도 이민 초기, 궁여지책으로 찾은 첫 직장이었다.
건국대 법상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해 주택은행에 취직했고 전도양양한 은행원 생활을 하던 남 회장이었다. 그런 이력을 가졌는데 낯선 땅에서 청소부라니, 그것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하는 야간작업이 대부분인.
하지만, 남 회장은 달랐다. 성격대로 어떤 일이든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반드시 해내고자 했다. 일을 하는 동안 남 회장은 투덜대기보다는 그 속에서 재미를 찾으려 했고, 개선하려고 했다. “당장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면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재미도 있고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발전의 기회도 찾을 수 있다.”
청소팀원이던 히스패닉 친구들에게 빌딩청소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저그런 직업이었겠지만, 남 회장에게는 미국에서 성공신화를 쓰는 첫 걸음이 된 차이였다. 남 회장은 키 큰 사람에겐 천장, 유리창 작업을, 비만인 사람에겐 앉거나 선 채로 할 수 있는 일로 구분해 분담시켰다. 또, 시간을 아껴 일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점심과 커피를 제공했다. 청소팀원들은 일을 시작한 지 2시간 정도만 지나면 참을 먹는다, 커피를 마시러 간다며 자리를 비워 일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던 차였다.
남 회장은 그런 변화를 시도해 4시간 걸리던 일을 2~3시간으로 당기게 됐다. 깔끔하고 빠른 일 처리에 용역수주가 늘었고, 팀원들도 수입이 늘면서 회사는 성장했다. 그렇게 4년을 청소회사에서 일한 남 회장은 시작할 때 4명이 전부이던 회사직원을 60여 명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팀원들에게 점심 샌드위치와 커피까지 제공한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청소업을 하면서 남 회장은 부동산 시장의 구체적 가능성을 봤고, 또 한 번 도약을 꿈 꿨으니, 그런 대단한 인연도 없을 것이다. 빌딩청소는 메인터넌스의 한 부분이었고, 부동산중개인으로 변신해서는 그런 경력이 소비자들에게 건물과 주택관리에 한층 해박한 정보제공으로 이어졌으니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경쟁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 기발한 아이디어와 추진력
남 회장은 “성공한 사람의 인생을 벤치마킹하라”라는 저서를 통해 ‘자본금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동산중개업이 가장 유망해 보였다’라고 밝혔지만, 사물의 이치를 꿰뚫고 과감히 실천하는 추진력이 없었다면 그런 선택은 어려웠을 것이다. 같은 책에서 남 회장은 ‘청소업을 하면서 부동산 거래와 연관한 다양한 비즈니스를 살피게 됐고, 부동산업은 미국경기의 발전과 쇠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소개했다.
전업을 결심하고 중개인 라이선스를 취득한 남 회장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부동산 새내기로서 고객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새로 입사한 회사의 출입구 곁 자리를 자원했고, 당시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홍보전략을 구사했다.
신문광고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벤치, 골프장 스코어카드, 각종 판촉물에 자신의 사진과 이름을 넣어 알렸다. “잘 하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크리스 남”이라는 이름은 곧 남 회장이 처음 에이전트로 활동하던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에서 화제가 됐다. 뉴스타(New Star)의 부상이었다.
남 회장은 새내기 에이전트 시절 첫 한 달 동안 광고비로 4년 간 청소업을 하면서 번 돈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밖에도 남 회장은 고가의 부동산용 계산기, 컴퓨터, 가드닝 세트 등을 구입하는 차별화 전략을 실천했다. 부동산용 계산기는 이자율과 대출금 월 상환액수 등을 자동으로 계산해 주는 특수장비로 에이전트들의 필수품이었지만 너무 비싸 대부분 수기나 암산에 의존하던 때였다. 가드닝 세트는 전직을 살려 오픈하우스를 할 때 의뢰인의 집 정원을 깔끔하게 다듬어 고객에 좋은 인상을 주는 데 활용했다.
퇴로가 없는 ‘올 인’(All-In)이었다. 충분한 계산을 했겠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추진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뛰었으니 업계 입문 첫해부터 엄청난 거래실적으로 ‘신인왕’과 ‘시즌 MVP’를 석권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발한 홍보전략과 관련해,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남 회장은 골프를 치면서도 재미난 아이디어를 실천했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은 잘 아는 일이지만 드라이버를 칠 때 꼭 필요한 게 나무로 만든 티(Tee)다. 그런데, 티라는 게 스윙하면서 부러지기도 하고 멀리 날아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골퍼들은 티 박스에 서면 이리저리 살피며 쓸 만한 티를 찾는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남 회장은 골프장에 갈 때 뉴스타부동산 이름과 연락처, 로고가 새겨진 티를 잔뜩 주머니에 가지고 가서는 일부러 몇 개씩 흘리고 다녔다. 나중에 ‘횡재’를 한 사람들은 어쨌든 한두 번은 뉴스타부동산을 되뇌일 것이 분명했다.
남 회장이 한인음악축제의 메인 스폰서를 하면서 뉴스타 직원들과 합심해 뉴스타 패션을 갖춰입고 현장을 홍보무대로 활용한 일화도 유명하다. 뉴스타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은 수백명의 직원이 축제현장에서 움직일 때마다 관객들은 알게 모르게 세뇌됐을 법도 하다. “또, 뉴스타부동산이네~.”
뉴스타부동산이 한때 전국에 3000명의 에이전트를 두고 3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한인 부동산회사로는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커뮤니티 봉사와 나눔의 실천
1988년 9월 가든그로브에 미국계 대형 부동산회사 리월티월드의 프랜차이즈 ‘리얼티월드 뉴스타’라는 첫 개인회사를 열고, 뉴스타부동산그룹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남 회장은 커뮤니티 봉사와 나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사업체 기반인 오렌지카운티(OC)에서 활동하며 OC한인회 부회장,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지역사회 봉사에 눈길을 돌린 남 회장은 90년 대 중반 LA로 진출하면서 범위를 더욱 넓혔다. LA한인회장, LA한인축제 대회장, 미주 한인상공회의소 연합회장,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총회장,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하며 한인사회 발전과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다.
남 회장은 회사이익의 사회환원에도 뜻을 뒀다. 2000년 뉴스타 장학재단을 설립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나눠주는 일을 지속해 오고 있다. “소외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줌으로써 단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는 일이 없고 인재가 꿈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작은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생전에 커뮤니티의 의미있는 행사에도 줄곧 크고작은 금액을 기부한 남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Oblige;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고자 노력한다”며 “이런 정신을 솔선수범해 자꾸 퍼트려 나가면 세상은 좀 더 밝고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치에 품은 큰 뜻은 ‘현재진행형’
여러 한인단체장 활동을 하면서 외연을 넓힌 남 회장은 2011년 한국 보수당인 한나라당의 재외국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것이 걸림돌이 돼 결국 사퇴하고 자문위원장으로 물러나면서 미완성에 그쳤지만 남 회장은 그를 통해, 참정권 확대를 위한 우편투표 실시, 복수국적 연령 확대, 동포청 설립, 해외 한인 권익신장을 위한 목소리를 한국정부에 전해 ‘상생’의 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1992년 겪은 ‘LA폭동’이 LA에 한인 시의원이 없었던 탓도 컸다는 이유로 남 회장은 단체장 활동을 하며 미주 한인 정치력 신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LA폭동 때 해병대 경험을 살려 동료들과 직접 총을 들고 한인사회 재산을 지켰던 경험은 이후 남 회장이 ‘한민족 1000만 명 미국거주’와 ‘미국에 한인 대통령 만들기’라는 원대한 꿈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2008년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이 탄생한 것을 본 남 회장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명연설이었다. 남 회장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과 킹 목사의 연설을 통해 받은 감동을 ‘미국에 한인 대통령을 만들자’라는 100페이지 안쪽의 짧은 저서를 통해 소개했다.
“흑인도 대통령이 되는 나라, 땅덩이가 넓고 기회가 무궁한 미국으로 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기회를 가꾸다 보면 주지사도 나오고 언젠가 한인 대통령도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를 가진 대한민국,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은 청년들의 해외진출이고, 특히 기회가 많은 미국은 최적의 땅이라는 논리다. 이민자의 나라에 한국인들도 미국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미국 이민은 옛 우리의 영토를 되찾는 ‘고토회복’일 수 있다고.
‘미국 인디언 중 가장 유명한 종족인 아파치족’이 한국말 ‘아버지’에서 유래했고, 그들이 몽골반점이 있는 동양인이라는 고 양주동 박사의 주장을 인용해 논거한 것이라 억지스러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남 회장의 꿈도 원대했음을 읽게 한다.
미국의 주 정부들은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외국 정부와 다양한 거래를 시도한다. 그럴 때 한국정부가 투자를 조건으로 한인이주 정책을 꾸준히 병행하면, 미주 한인 1000만 명 시대가 올 것이며, 똑똑하고 근면성실한 한인 후손들 중에 대통령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문기 공약’은 현재 진행형이지 않을까.
[출처 조선일보]
https://chosunlatimes.com/bbs/board.php?bo_table=hotclick&wr_id=5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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