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일즈는 예술, 존엄성의 교감 “뉴스타부동산 그룹 남문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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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는 예술
존엄성의 교감
‘뉴스타 부동산 그룹’ 남문기 회장

이 지면이 영상이면 좋겠다. 그래야 기자가 인터뷰 도중 들은 셀폰 수신음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300달러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나이 남문기(63) 회장의 셀폰 수신음을 들었을 떄, 기자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빵 터진 것
한시간 반 남짓의 인터뷰중 뉴스타 부동산의 사가가 우렁차게도 울려 퍼졌다.
“뉴스타 샛별들/ 조국과 민족을 위해/열심히 일하자/가자 미래로/힘차게 뻗어나가자”
마치 행진곡처럼 씩씩한 이 사가를 자신의 셀폰 링(ring)으로 저장한 인물, 그건 남문기 회장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면이자,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단서였다.
남 회장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미주 한인들 가운데 신문이나 TV,라디오,빌보드,심지어 길거리 벤치 등 모든 매체를 통해 그의 광고를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달랑 300달러 들고 미국에 와서 굴지의 부동산 그룹을 일군,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꼽힌다. 그래서 기자는 이미 잘 알려진 그의 성공스토리 외에도, ‘인간 남문기’에 집중했다. 유쾌한 그와의 인터뷰. 지금부터 들어 보시렵니까

내년, 설립 30주년 맞는 뉴스타
남문기 회장은 세일즈로 우물을 판 사람이다. 1987년 부동산 업계에 뛰어든 뒤 꼬박 30년을 세일즈에 바쳤다.
29세의 청년 남문기는 1982년 단돈 300달러 들고 미국 땅을 밟은 뒤, 4년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청소 용역일을 했다. 부동산으로 눈을 돌려 에이전트 자격증을 취득, 9개월간 미국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1988년 가든그로브에 뉴스타 부동산 그룹의 전신인 ‘리얼티 월드 뉴스타’를 설립했다. 그 때 그의 나이 서른 다섯 , 내년 2018년이면 뉴스타 그룹은 설립 30주년을 맞는다. 남들은 다운타운 자바와 봉제에 뛰어들던 시절, 그가 부동산을 선택한 건 청소 업계에서 일하며 관찰한 결과였다. 집을 하나 사면, 은행,융자,감정,보험,청소,페인팅,카펫,조경 등 여러 분야가 유기적으로 움직에게 된다. 청소 서비스를 하면서 이를 깨달은 그는, 부동산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부동산 에이전트를 시작한 첫 달, 광고비로 지출한 돈이 당시 8,000달러, 4년간 청소하며 피땀 흘려 번 재산의 5분의 1을 쏟아 부은 것이다. 이 때 부터 남 회장의 세일즈 철학 1호, ‘광고,광고,광고!’가 시작됐다.

트위터 팔로어 11만 6천명
남 회장의 광고 사랑은 유별나다. 그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과 뉴스타를 광고한다. 신문 등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버스 정류장의 유리창, 길거리 벤치,대형 빌볻드, 심지어 골프티에까지 자신 또는 뉴스타의 이름을 새겼다.
뿐만 아니라 SNS 파급력을 그가 놓칠 리 없다. 지금 그의 트위터 팔로어는 11만 6,000명, 인스타 그램,페이스북,블로그,카톡,웹사이트 등도 그가 즐겨 쓰는 광고 수단이다.
남회장의 웹사이트에는 그의 학력과 경력, 강연활동, 수상내역, 7개의 저서, 그동안 미국과 한국의 언론에 소개된 기사와 영상등이 총 망라돼있다. 심지어 그의 이야기를 인용한 책들과 기사까지 목록화 해 놓았을 정도,
뉴스타 건물의 복도와 화장실에는 그가 대통령,국무총리,시장,유명인들과 만난 사진들이 카테고리별로 분류돼 전시돼 있다. 거의 박물과 수준이다.
“저는 누구든 처음 만나고 나면, 저의 웹사이트와 블로그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줍니다. 누구든 쉽고 간편하게 나와 뉴스타에 대해 알 수 있게 하지요, 그리고 저의 모든 족적을 기록해 역사 박물관처럼 운영합니다.”
그리고 남 회장을 개인 인터뷰로는 처음 만났던 이 날, 기자 역시 어김없이 그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감옥의 재소자도 내 손님
남 회장의 광고 수단은 어떤 매개를 통해서만이 아니다. 그의 언행 자체가 움직이는 광고다. 예를 들어 그는 식당에 밥 먹으러 가면, 일부러 문을 향해서 제일 앞자리에 않는다.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다. 그의 말이 재미있다.
“이렇게 살면요? 지인이 나를 알아보고 내가 밥 값 내줄 확률이 높아지죠(웃음) 바쁘게 살다보면 어차피 내가 모든 지인들과 같이 밥 먹을 확률이 낮잖아요. 그러니이렇게 내가 밥값이라도 내면서 친분을 쌓는거죠”
어디서든 나를 가능한 눈에 띄게 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나를 적극 알리는 것. 기자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 정도로 세일즈가 몸에 밴 사람을 만나 기억은 없다. 생활에 배어있는 셀프 광고는 , 자신과 회사에 대한 자신감이 확고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그는 공항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그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출장 가서 노천 온천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온천에서 만난 두명의 한인 할머니들이 남 회장을 알아보고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남 회장이 듣게 됐다. 그가 먼저 할머니들에게 말을 걸자, 그 중 한 할머니가 “내가 브라질에 사는데, 남 회장이 거기서도 유명하다”고 했다고, 마침 밥 때였다. 그는 두 할머니에게 밥을 사 드렸다.
한 번은 남 회장이 중국 광저우에 갔다가, 룩셈부르크에서 여행온 한인을 만났다. 룩셈부르크 거주자라는 그는 “한국 방송에서 남 회장의 스토리를 봤다”며 반가워하더라는 것
남 회장은 비행기에서 만난 스튜어디스의 서비스가 친절하다고 느끼면, 해당 항공사의 웹사이트를 방문해 그 스튜어디스에 대한 칭찬의 글을 남긴다고 한다.
“그 사람 개인으로 보면, 본인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제 이름이 뇌리에 각인될 거고요. 긴 세일즈로 보는거죠. 내가 존엄성을 가지고 대하면, 상대도 나를 존엄성을 가지고 대하게 되지요. 어딜가나 내가 먼저 인사하면, 감옥의 재소자라도 내 손님이 됩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받고 컴퓨터를 배우다.
이런 남 회장에게도 어려운 시기는 있었다. 2007년 서브프라임 파동을 겪었고, 2002년 간경화 말기, 2012년 간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난으로 인식하지 않고 넘어갔다. 2002년 간경화로 3개월 산다고 진단 받은 그는 뉴스타 그룹 산한 IT회사를 차리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10년을 더 살고 간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제가 82년 미국 올 당시까지도 전깃불이 안 들어오던 경북 의성 벽촌에서 6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당시 폐결핵을 앓으셔서, 저를 안 낳으려고 엿기름 마시고 논드렁에 뛰어내렸대요. 저는 잘 태어났고, 당시 얼마 못 사실 거라던 어머니는 제가 46세 될 때까지 사셨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간경화 진단 받았을 때도 , 곧 내 병에 맞는 약이 나올거다 생각하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웃음)”
‘초긍정의 사나이’ 남 회장. 기자가 “그 셀폰 링을 저도 다운받고 싶다.”며 너스레를 떨자, 그는 “우리 회사 탑 에이전트들은 다 나처럼 뉴스타 사가를 셀폰링으로 쓴다”며 웃는다. 인터뷰 후 우리는 같이 도시락 점심을 까먹고, 그는 다음 스케쥴을 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출처 : 한국일보 매거진 / 라이프 & 스토리 (3/17/2017)

글 사진 : 김수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