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아저씨’ 남문기

By Ashley Hong, in Uncategorized on .

뉴스타부동산 남문기 회장의 장례식이 3월31일 LA에서 엄수됐다. 향년 67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그의 죽음은 미주 각처와 한국에서도 쏟아져 나온 부음 기사를 통해 알았다. 간경화 말기로 3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은 후 20년 가까이 투병하며 그 왕성한 활동을 이어 왔다니 무엇보다 그 정신력이 믿기지 않는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88년이었다. 오피스 밖이 왁자해 나와 봤다. ‘청년 남문기’였다. 어디서나 활기 가 넘치고, 목소리도 컸던 사람. 그의 부동산과 나의 기자 생활은 그 1년 전, 같이 시작했다는 작은 인연이 있다.

가든그로브의 구 뉴스타 사옥은 마침 그 때 근무하던 한국일보 오렌지지국 길 건너에 있었다. 일요일 밤 12시가 넘도록 불이 꺼지지 않던 한인상가의 유일한 사무실이었다. 그 시간까지 그는 늘 혼자 일하고 있었다.

웬 풍선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던지, 헬륨 통을 가져다 놓고 풍선을 불고 있을 때도 많았다. 오피스에 따라 나온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는 길에 들르면 손목에 풍선 하나를 매달아 줬다. 한창 풍선을 좋아할 나이였다. 아이에게 그는 ‘풍선 아저씨’로 불렸다.

풍선 아저씨는 화장실 담당이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던 그 건물의 화장실 청소는 사장인 그가 했다. 빗자루나 솔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걸 보곤 했다. 풍선 아저씨는 집을 참 쉽게 팔았다. 그의 손에 넘어오면 복잡하게 꼬여 있던 거래도 쉽게 풀렸다. 재주였다. 이것 따지고, 저것 재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와 만나면 단순해 졌다. 따지지 않으니 집을 사고 파는 것이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7년쯤 지났나, 문득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미 스타였다. 설렁탕 집을 가도, 길을 가다가도 모르는 사람이 “남문기씨 아니세요?” 먼저 인사를 하며 반가워했다. 광고 파워 같았다. 그는 신문이나 거리의 벤치에서도 늘 볼 수 있는 유명 이웃이었다.

옆에서 본 부동산 시장은 무협지의 세계 같았다. 무림의 협객들이 수시로 출몰하고, 곳곳에 암수가 매복해 있기도 한 곳. 그가 그 세계에 뿌리를 깊이 내려 갈수록 교유의 기회는 줄었다. 시간도 공통의 화제도 없었다. 호경기면 호경기여서, 불경기면 불경기인 대로 집은 항상 사야 하는 것인 업계의 논리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잠시 본 그는 유럽산 승용차에 운전기사와 비서가 있고, 남산이 보이는 호텔 맨 위층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성공한 이민 비즈니스 맨으로 대학, 기업, 단체 등에 연사로 초청되고, 미디어와 정계에도 발이 넓은 듯했다. 가끔 조우하게 되면 “(차이가) 얼마나 더 벌어지나 봅시다” 나름 덕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같이 출발했으나 한쪽은 고인 물, 다른 쪽은 강을 지나 바다로 흘렀다는 의미였다. 이런 인사에 그는 늘 환히 웃었다.

다시 소식이 오간 것은 신문에 짧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였다. 근 25년만이다. 글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는 찬물에 밥 말아먹듯 글도 술술 잘 쓰던 사람이었다. 집 파는 것도, 글 쓰는 것도 그에겐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한 때 쏟아져 나온 그의 회사 광고 메시지들은 대부분 그가 써내려간 것이다.

다시 물꼬를 튼 대화는 주로 지난 일이 소재였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열심히 뛰어놀던 딸 미야, 그 남편이 그에게 장기를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닮은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고민을 나누던 일도 새삼 기억났다. “(몸도 안 좋은데) 그런 걸 왜 해요?” 지나가는 말로 그가 관여하는 단체 이야기도 했다. “그게 말이야…”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그의 건강은 알려진 것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한 번 보자, 보자 하면서 결국 못 봤다.

이런 회고담을 나눠도 될까 망설였다. 특별한 내용도 없지만, 혹 누가 되지는 않을까, 개인적인 이야기가 얼핏 비춰져야 하는 것도 그랬다. 그의 한창 전성기 때를 나는 오히려 잘 알지 못한다. 미주 전역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비즈니스를 확장하고, 많은 단체와 한국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의 소식은 주로 미디어나 전언으로 들었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후 그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그는 미주 한인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민 1세중 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만났던 ‘풍선 아저씨’는 속살이 여린 사람이었다. 아무리 진지하게 이야기해도 한 껍질만 벗기면 장난끼를 감출 수 없는 막내의 표정이 있었다.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못 말리는 열정, 열심, 강인함의 뒤에는 이런 그가 있었다.

그를 전해 듣기만 했거나, 혹 비즈니스나 사회활동 중에 경쟁관계에 있기도 했을 이들에게 그의 이런 모습도 나누고 싶었다. 이런 방식의 조문도 용납되기를 바란다. 긴 통증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남 회장, 영면하시라.

한국일보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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